1979~
Storytelling
개청 40주년 은평구 스토리텔링 사진집
은평, 그곳에 살다
Eunpyeong, live there.
01
서울시 이전의 은평
서울시 이전의 은평을 소개 합니다.
02
은평의 서울시대
광복 이후 은평의 서울시대 시작.
03
은평구의 탈바꿈
함께 살아가는 은평, 은평구의 탈바꿈
04
비상하는 은평의 21세기
시대 정신을 잘 알고 실천하는 시민
광복과 한국전쟁
중종 숙의 나씨묘에서 바라다 보며 찍은
현재의 증산동 새마을 금고 본점 (조선기와집)의 모습 / 1955
by 나창균
녹번리 / 1950년대
by 도깨비뉴스
응암동 163번지에서 바라본 은평구 전경 : 멀리 바라보이는 들판이
현 역촌동 구산동 대조동 갈현동 일대 / 1954
by 차철수
냉정골 전경(현 응암1동) / 1955
은평 / 1954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은평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946년 9월, 서울이 경기도 관할에서 벗어나 수도로서의 위상을 되찾았고, 1948년 8월, 서대문구가 지금의 은평구 지역 대부분을 편입하면서 은평의 서울시대가 시작되었다.
녹번동의 출장소가 은평 지역의 행정을 맡았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깐이었고, 남북 분단이 현실화되고 말았다. 국군이 창설되었고, 군사기지 수색에서 제11연대 등 많은 부대들이 창설되었다. 지금도 진관동 입곡삼거리 부근에는 기계 화사단의 전차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민족사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도심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은평도 큰 피해를 입었다. 9월 말 벌어진 서울 탈환전에서 주 전장은 인접한 연희고지 일대였지만 은평 지역에서도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녹번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나 자원입대한 28세의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중위가 희생되었다. 역촌역 옆 은평평화공원에 그의 동상과 추모비가 서 있다.
평화공원 준공 / 2010
평화공원 해밀턴 쇼 제막식 / 2010
평화공원 해밀턴 쇼 제막식 / 2010
은평 입장에서 한국전쟁 기간 물적 측면의 최고 손실은 고찰 진관사가 전각 대부분을 소실당한 것이었고, 인적 손실로는 녹번리에 살던 정지용 시인이 납북 과정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은평초등학교 등 학교들도 전화를 입어 다른 곳에서 수업을 진행하여야 했다. 전쟁은 수많은 전쟁고아를 만들었고 수많은 고아원이 생겨났는데, 은평구에도 은평 천사원이 5명의 전쟁고아를 거둘 천막을 치며 문을 열었다.
은평천사원은 얼마 후 미군이 지어준 퀀셋막사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번듯한 건물을 지으면서 도시의 변화와 함께하며 천 명이 넘는 아이들을 성장시켜 사회에 내보냈다. 현재 은평천사원은 시대 변화에 따라 장애인종합복지기관으로 발전하였고, 2012년 엔젤스헤이븐으로 개명하여 세계로 봉사 영역을 넓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서북지방에서 온 피난민들도 주로 수색 부근에 많이 정착하여 평안도민회를 구성하는 등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은평천사원 / 1960년대
by 엔젤스헤이븐
은평천사원 / 1959
by 엔젤스헤이븐
은평천사원 / 1959
by 엔젤스헤이븐
은평천사원 / 1979
by 엔젤스헤이븐
은평천사원 김장하는 모습 / 1980년대
by 엔젤스헤이븐
은평천사원 / 1959
by 엔젤스헤이븐
서울의 서쪽 관문 수색역도 역사가 파괴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철도는 군사시설이어서 조금의 여유라도 있으면 수시로 긴급복구를 해야 했다. 전선(戰線)이 고착된 1952년 말부터 철도는 다시 귀경 승객 수송을 개시했다. 미국 등의 원조로 자재를 도입, 보강공사를 추진한 결과, 1957년까지 철도시설의 90% 이상이 전쟁전의 상태를 회복했다. 전쟁을 거치면서 철도에도 디젤기관차의 등장 등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1958년에는 수색역사도 재건되었다. 6·25전쟁 이후 전후 복구를 위해 각종 물자들이 서울로 운송될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행해진 조치였다.
은평 / 1956
수색동 전경 : 초가와 기와가 함께 어우러져있다 / 1959
by 박순금
수색동 전경 : 전쟁 후 이곳으로 피난민들이 많이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 1959
by 박순금
녹신동 사무소 직원 및 통장 일동 / 1956
by 차철수
녹번동 응암1동 여름 전경 / 1956
불광지구/역촌지구 대단위 토지 구획정리사업
광화문을 기점으로 해서 10km가 안 되는 이 지역은 새로운 주택지로 각광을 받기에 손색이 없었다. 불광 지역의 신주거지를 시작으로 은평이 서울의 새 보금자리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1956년에는 171세대의 재건주택 단지가, 1958~1961년 사이에 국민주택 단지가 들어섰다.
역촌동 구획정리사업 당시 / 1960
by 최준호
녹번동 안장박골 돌산위에서 : 녹번, 불광, 갈현,대조동 배경 / 1969
by 차철수
불광동 ICA아파트 / 1963
by 서울신문
이후 녹번동의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미국 국제협조처)주택, 불광 우체국 뒤쪽의 녹신주택, 갈현시장 입구쪽의 주택단지, 연신내에서 예일여고 사거리에 이르는 개천 따라 들어선 신흥주택들은 은평구를 살고 싶은 선망의 동네로 만들었다. 상당수 주택들은 ‘식침분리’구조로 만들어져 잠자는 곳과 밥을 먹는 장소가 구분되었는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구조였다. 불광주택단지에는 정부 고위관리들도 많이 살았고, 문화예술계 인사들도 오래 살면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불광동의 주택지 건설은 당시 건축사업에 종사하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은평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국민주택단지는 주로 야산이나 교외지역에 자리 잡았기에 변두리지역 개발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교외지역에 주택들이 건설되면서 도로와 상하수도, 전기 등 도시 기반시설들의 정비와 함께 지역개발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4학년 학생들이었던 김경숙 씨와 홍혜선 씨가 1964년에 함께 조사하여 쓴 <서울 집단주택지역의 지역성> 이라는 졸업논문에 의하면, 그때의 불광동 사람들은 활동력이 왕성한 연령층이 동네의 중심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직업분포에서도 사무직 종사자가 24%, 상업인이 20%, 공무원이나 교수와 같은 전문직업인이 16%를 차지하여 당시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게 문화와 경제의 수준이 골고루 높았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또 다른 조사를 봐도 그때 불광동 사람들의 텔레비전 보유율과 신문 구독률 등이 서울에서 가장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은평구도 이렇게 본격적으로 도시화되었지만, 지방에서 밀려드는 이농 인구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수색의 천막동, 교외의 비닐하우스 등 열악한 환경에 사는 주민들도 많았다.
「1953년 휴전이 되고 그 전에 정부는 환도(還都)했으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서울은 폐허가 되었다. 도심에 집들이 지어지고 복구에 힘을 쏟았지만 돌아오는 시민들을 품어 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막노동을 하더라도 서울로 가서 입에 풀칠하겠다는 농민들의 상경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서울 특히 4대문 안은 빠른 복구가 시작되었지만 물밀듯이 밀려드는 유입 인구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정부는 서울 4대문 밖에 적당한 주거지를 새로 개발하는 사업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불광지구 대단위 토지구획정리사업이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이란 토지소유자로부터 토지의 면적이나 위치 등에 상응하는 일정률의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필요한 공공시설을 정비하는 사업이었는데, 은평 토박이들은 학교와 도로, 관공서 등이 모두 자신들의 것으로 마련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 오경자 진관동 -
대조동 불광1동 옛 국민주택 모습 (현재 현대홈타운) / 1948
by 차철수
독박골 이재민촌 (현 불광동 현대APT 일대) / 1960.11.30
「그 당시에는(대조초 재학시절) 불광동이 중심이었습니다. 현재 하나은행 사거리 등 역촌동 일대는 논밭이었습니다. 역촌오거리와 예일여고 사거리에도 개천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학교를 가려면 논밭을 지나서 갔었지요..」 - 서애란 대조동 -
중학생들이 서오릉으로 소풍가는 모습(다리는 현 예일여고 사거리) / 1960.05
by 차철수
응암동 수재민집마당 누나들과 / 1959
by 김일상
응암동 수재민집마당 메리와 / 1959
by 김일상
수색동 정착민에게 구호미를 전달하는 모습 / 1960
수색동 천막동 모습 / 1961
구산동 마리아 수녀회 갱생원 개원 / 1984
구산동 마리아 수녀회 갱생원 개원 / 1984
신창이발관 앞에서 찍은 사진 (진관동 148-12) / 1975
by 김영숙
은평공민학교 개교식 / 1973
은평공민학교 개교식 / 1973
은평공민학교 개교식 / 1973
은평공민학교 개교식 / 1973
응암동 마약중독자 치료소 준공 / 1960
응암동 마약중독자 치료소 준공 / 1960
응암동 소년의 집 개관식 / 1975
응암동 소년의 집 개관식 / 1975
응암동 시립아동보호소 운동회 / 1967
응암동 시립아동보호소 운동회 / 1967
응암동 시립아동보호소 운동회 / 1967
정부는 1965년부터 도심의 무허가주택에 사는 빈민들을 외곽 지역에 강제이주시켰는데, 말 그대로 땅만 주었을 뿐이어서 천막을 치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강인한 생활력을 발휘하여 점차 흙벽돌집이나 판잣집으로 바꾸면서 살아나갔다. 1960년대는 마포아파트를 시작으로 여러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로, 은평에도 32세대 규모의 수색아파트가 1968년에 지어졌다. 수색아파트는 그 시기 아파트의 특징인 연탄 아궁이와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당시 수색에서 가장 최신식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아주 많이 노후화되어 수색증산뉴타운 개발로 철거를 앞두고 있다.
수색아파트 모습 / 2010
수색아파트 입구 / 2010
수색아파트 계단 올라가는 곳 / 2010
수색아파트 수색아파트 복도 / 2010
수색아파트 입구 벽에 걸린 시계 / 2010
은평의 농업과 대장간, 그리고 수색동 연탄공장
많은 지역에서 도시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후반까지도 은평은 농업의 비중이 높았다. 특히 진관동이 그러했는데, 500년 전부터 조상 대대로 은평 지역에 살아온 김주환 씨의 증언에 의하면, 밭농사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어서 기름종이를 발라서 바람을 막아 지금의 비닐하우스처럼 만들어 겨울에도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쌀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논에 모내기를 하라는 서울시의 지시가 내려왔는데, 저수지도 없고 가뭄으로 물을 댈 수 없었던 곳에 소방차를 동원하여 모내기를 했다고도 한다.
은평은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기에 농기구 수요가 많아서 은평 지역에는 많은 대장간이 들어섰는데, 놀랍게도 아직 불광대장간과 수색의 형제대장간이 남아 있다. 두 곳에는 여전히 망치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으며, 두 군데 모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형제대장간의 경우 인근에 들어선 방송국에서 주문하는 사극용 소품들이 매출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고색창연한 대장간들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문 품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불광대장간 / 2015
불광대장간 서울미래유산 / 2019
불광대장간 / 2015
「1대 대장장이신 아버님(박경원)이 15세부터 대장간에서 머슴으로 일을 시작하시면서 배운 기술을 가지고 리어카에 이동식 대장간을 만들어 은평구 지역을 돌아다니시면서 대장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1963년 첫 대장간을 지금의 불광초등학교 자리에 개업하고, 이후 불광천이 복개되면서 서부시외버스터미널 앞으로 이전하였습니다. 당시가 불광대장간의 전성기로 제가 그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의 서부시외버스터미널은 경기도는 물론 강원도까지 가는 버스들이 다니던 곳으로 유동인구가 많아 대장간이 번창하였죠.
그 후 건물의 사정으로 이곳 대은초등학교 앞으로 이전하여 지금까지 한곳에서 대장간을 열고 있습니다. 2012년 구청에서 미래유산이라는 것을 만드니 신청하라고 하였고, 그 후 서울시에서 나와 인터뷰를 한 후 문화재위원 9명이 평가하고, 다음 해에 미래유산 명판을 달아주었습니다. 어느 날 병에 걸려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시던 이웃 어르신이 불광대장간이 그대로 있어 자신이 살던 그 시절을 기억할 수 있어 너무 좋다고 하시는 모습에서 더욱 이곳을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 박상범 대조동 -
모래내대장간 / 2010
모래내대장간 작업모습 / 2010
형제대장간 작업모습 / 2010
형제대장간 / 2010
수색대장간 나원습씨 대장간 / 1960년대 후반 70년대 초
수색대장간 나원습씨 대장간 / 1960년대 후반 70년대 초
은평에는 예나 지금이나 이렇다 할 큰 공장이 없지만 수색동만은 예외였다. 1955년부터 수색동에 자리잡기 시작한 삼천리연탄과 1971년에 수색으로 이전된 삼표저탄장과 대성저탄장, 한일연탄 등 많은 연탄공장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수색연탄공장 이전 문제가 머리에 떠오르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을 못갔어요. 사관학교 신체검사에서 떨어지고 대학은 완전히 포기해버린거죠. 그러면서 연탄장사를 했지요. 수색연탄공장에 가서 연탄을 줄서서 기다리며 차로 실어다가 받아서 리어카로 배달도 하고 그랬었지요. 그 일을 잠시 하다가 그 후에 공무원 생활을 했어요.」 - 최준호 역촌동 -
삼표연탄공장 / 1972
by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한일연탄공장 / 1972
by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삼표연탄공장 / 2009
by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한일연탄공장 / 2009
by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삼표연탄자리 : 메디컬타워에서 바라본 / 2010
by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삼천리연탄의 흔적 / 2010.01
by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삼천리연탄의 흔적 / 2010.02
by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수색동에 연탄공장이 많은 것은 물론 철도의 영향이 컸다. 철로를 따라 강원도 탄광에서 직접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도권 주민에게 연탄을 공급할 공장이 많이 들어선 것이다. 분진과 가스중독이라는 치명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연탄은 서민들이 겨울을 날 수 있게 하는 일등 공신이었고, 산림 보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은평주민 특히 수색, 증산동 주민들은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1973년에는 대조동에 서부버스터미널이 들어섰다. 남북 분단으로 인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의선 자리를 버스가 대신한 것이었다. 서울 서북쪽 끝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많은 버스회사와 택시회사가 들어섰고, 이들 역시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역경제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서부터미널 전경
동고택시 입구 전경 / 2010
by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경부교통 차고 (1973년부터 증산동에 위치) / 2010
by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경부교통 전경 (1973년부터 증산동에 위치) / 2010
by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선진운수 종점 / 2019
덕신기업 / 2019
어쩌면 연탄공장과 서부버스터미널, 버스와 택시회사들은 산업화, 도시화시대를 맞는 은평의 상징적인 존재일 것이다. 또한 예일여고, 충암고, 대성고, 선일여고 등 대표적인 지역 사학들이 설립되고, 숭실고, 동명여고 등이 이전하면서 교육시설도 갖춰지기 시작했다. 특히 윤동주 시인과 황순원 작가를 배출한 숭실고의 이전은 문학도시 은평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제가 대조초등학교 1 회 졸업생인데... 당시 학교가 큰 편이었습니다. 오전, 오후반도 있었죠. 한 학년 10개 학급으로 학급당 학생수는 70명 정도 되었습니다. 역촌초등학교도 생겨 일부는 거기로 가기도 했습니다. 파주나 금촌에서 유학을 오기도 했죠. 당시 통학은 버스를 타거나 걸어다녔습니다. 버스는 토큰과 회수권을 사서 타고 다녔지요. 그리고 대조초와 동명여고에도 스케이트장이 있었는데 없어져서 우리 집 막내는 삼송리까지 가서 지치고 온 기억이 나네요.」 - 서애란 대조동 -
「우리 애들이 다 충암중·고등학교를 나왔어요.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습니다. 학교는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 애들이 여기를 나왔으니까 역사를 다 알죠. 여기가 옛날에는 무덤이었대요. 아내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동네였어요. 논밭이 있었고요. 」 - 서성희 응암동 -
동명여자고등학교 정문에서 손님을 맞는 걸스카웃 학생들 / 1980
by 동명여자고등학교
동명학원 교정 / 1970
by 동명여자고등학교
숭실고등학교 신사동부지 토목공사 (옛 고택골) / 1973
by 숭실고등학교
숭실고등학교 전경 / 1978
by 숭실고등학교
예일학원 구산동 8-3 신축이전 / 1969
by 예일여자고등학교
예일여자고등학교 교정 학생들 / 1981
by 예일여자고등학교
은평을 사통팔달로 만든 도로들
서대문구 홍은사거리와 은평구 진관동을 지나 임진각까지 이르는 통일로는 1970년대초만 해도 은평구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도로였다. 1970년대 중반 역촌동과 신사동, 증산동, 수색동을 잇는 길을 넓혀 성산대로로 연결하고 서대문구 연희동과 은평구 응암동 사이의 고개를 뚫어 길을 만들었다.
은평구가 서대문구에서 분구한 1979년에는 이미 은평구의 주요 도로망 포장이 완료되었다. 통일로를 중심으로 진흥로, 은평로, 서오릉로, 증산로, 연서로, 가좌로를 주간선도로로 갈현동길과 응암로를 보조간선도로로 하는 형태였다.
1980년대는 은평구의 교통개발이 본격화된 시기였다. 1980년 은평구와 종로구를 직접 연결하는 북한산 구기터널 공사가 마무리되어 도심으로의 접근성이 훨씬 좋아졌다. 이후 개설된 도로는 대개 접근성이 떨어지는 주거밀집지역과 도심내 저소득층 밀집지역을 통과하였다.
증산-수색 도로확장공사 / 1973.07.23
통일로 기념비 / 2003.05
녹번 삼거리 도로 모습 / 1990년대
홍제동, 녹번동 도로확장공사 / 1966.04.22
홍제동, 녹번동 도로확장공사 / 1966.04.22
홍제동, 갈현동 간 도로확장공사 기공식 / 1966.05.16
녹번 수색 도로확장공사 :
녹번 삼거리에서 수색간 도로 확장 공사 / 1970
by 차철수
녹번 수색 도로확장공사 :
도원극장과 서부 오토바이상사 앞
도로 확장 공사 모습 / 1970
녹번 삼거리에서 새동리 도로 확장 공사 전경 / 1972.04
by 차철수
응암2동 홍은3동 기간도로 기공식 / 1972.03.29
증산-수색 도로확장공사 / 1973.07.23
응암2동 홍은3동 기간도로 기공식 / 1972.03.29
은평출장소 충암중고교 간 도로개설 / 1978.03.29
불광1동-불광2동 도로개설 공사 기공식 불광동 전경 / 1975.01.22
은평육교 준공식 / 1975.05.27
불광1동-불광2동 도로개설 공사 기공식 불광동 전경 / 1975.01.22
불광천을 가로질러 신사동과 녹번동을 잇는 신사교 / 1975.05.27
은평육교 준공식 / 1975.05.27
은평육교 준공식 / 1975.05.27
은평의 전통시장들
은평구는 주거지역답게 많은 전통시장이 있는데, 거의 주택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한 1960년대 중반 이후에 들어섰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고양군민들도 많이 찾을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1993년에는 연서시장 등 18개 시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12개, 그 중 리모델링 중이거나 재개발지역에 포함되어 실질적으로 기능이 상실된 4개 시장(양지시장, 수일시장, 응암시장, 증산골목시장)을 제외하면 8개 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점포는 1992년에 1,001개였는데, 현재는 577개, 노점 188개로 외면상으로는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불광시장은 NC백화점으로, 갈현시장은 대형마트와 상가로 변신하는 시대적 변화를 겪었고, 점포 면적도 많이 넓어졌기에 숫자만큼 쇠퇴했다고 보기만은 어렵다. 대림시장 등 남아있는 시장들도 슬레이트지붕을 걷어내고 아케이드 지붕을 설치하는 등 10여년 전부터 환경개선사업을 진행하여 면모를 일신하였다. 하드웨어의 변화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과거 구에서 운영한 상인대학에 참여하는 등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림시장에서부터 신양극장 그 일대까지 전부 다 수재민 집이었어요. 제가 들어왔을 때 거의 다 논밭이었고 집이 드문드문 있었지요. 그때는 서대문구 관할이었어요. 이건 1978년에 대림시장 입구에서 찍은 사진인데 이 건물(태권도장 있는 건물)이 아직 그대로 있어요. 다만 전신주가 없어졌고, 이 주변 집들도 다 변했지요. 」 - 김일상 응암동 -
수색초등학교 앞 수일시장 골목까지 제설작업 / 1974년
응암3동 대림시장 / 2015.01.21
대림시장 입구 / 1978
by 김일상
1978 대림시장 입구와 같은 곳 (태권도장 건물)
구파발시장
구파발시장
구파발시장
구파발시장
「버스노선이 연장되지 않아 통일로 큰길까지 걸어 나와야 하는데 도로포장이 안 된 상태라 비가 오면 진흙뻘 같은 길을 푹푹 빠지며 걸어야 했죠. 장화를 신고 나와 통일로 입구에서 구두로 바꿔 신고 출근을 하느라 근처 진관시장이나 가게에 단골을 트고 신발들을 맡기고 다니기도 했었어요. 」 - 오경자 진관동 -
「앞에 있는 도로는 녹번동과 대조동 사이에 흐르는 하천을 복개한 것이에요. 하천에 물고기는 없고 악취가 심해서 아이들이 엄청 싫어했던 곳인데, 어느날인가 복개를 했더라고요. 사진에 보이는 강화상g회는 아직도 있는 곳인데 40년이 넘었겠네요. 사진에 보이는 골목이 재래시장인 대조시장 입구인데 아직도 있잖아요. 왼쪽의 건물 1층은 약국, 2층에 뉴욕제과가 있는 저 건물은 주위가 다 바뀌었는데 아직도 그대로 있어요. 시장입구라 상품을 실은 리어카와 자전거가 보이고, 리어카에 항아리를 싣고 판매하고 자전거와 도보로 중화요리 배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 - 박부영 진관동 -
대조시장 입구 / 1983
by 박부영
신응암시장 / 2013.01
대조시장 입구 : 83년의 강화상회는 그대로이나 뒤편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 2000
by 박부영
증산종합시장 외관 / 2010
증산로 15번가길 증산동 골목시장 풍경
1980년대 중반 대림시장의 식당들이 돼지 등뼈와 감자, 우거지 등을 넣고 끓인 감자국을 팔기 시작하면서 감자국거리가 형성되었고, 감자국의 인기가 각지로 퍼져나가 감자국 (감자탕) 전문 식당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NC백화점이었던 자리가 대조시장이 었습니다. 개천가였고 선술집이 있었습니다. 특히 역촌오거리에 선술집이 많았고 개천은 깨끗하지는 않았어요. 시장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단칸방 집이 많았습니다. 콩나물공장도 있었습니다. 현재 쿠아레빵집에서 조금 올라가면 콩나물공장이 있어서 거기서 사왔습니다. 」 - 서애란 대조동 -
「지금 대조시장과 NC백화점이 있는데 그때는 NC백화점 자리까지 다시 장이었고, 우리은행이 지금 빌딩으로 신축되기 전 단층일 때 그 뒤는 다 여관골목이었고 나머지는 다 시장이었습니다. 활동하고 모임 끝나면 순대랑 막걸리 먹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대조시장 일부가 조금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30년째 정월대보름에 그곳에서 지신밟기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 - 홍미경 갈현동 -
수색로 16길 수일시장 입구
수색로 16길 수일시장 풍경
수색로 16길 수일시장 풍경
대림시장 감자국거리
대림시장 감자탕
「제가 처음 은평구에 왔을 때 은평구는 다른 서울 같지 않았어요. 시골 느낌? 제가 분교를 다녔거든요. 텔레비전에서 보던 서울역 빌딩 뭐 이런 것도 없고, 응암시장하고 대림시장이 있었고. 우리 시골에서는 장터가 있었거든요. 」 - 박종배 응암동 -
「2010년 당시 제가 왔을 때는 옛날 오래된 다세대, 빌라, 주택들이 있었고, 연신내 전통시장도 있었는데 그 전통시장이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다르게 변해가고 규모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은평구가 발전하면서 옛 모습들이 줄어드는데 전통을 계속 간직하고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는 계획도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 - 이재찬 불광동 -
연신내 범서 쇼핑 센터 / 1996
수색동 삼익유통 종합구판장 개장 / 1981.11.30
수색동 삼익유통 종합구판장 개장 / 1981.11.30
불광극장 내부(1983년 폐관) / 1963
응암2동 한복시네마 / 1996
도원극장 / 2012
불광극장(1983년 폐관) / 1963
대조동 양지극장 / 1996
서부오토바이상사 앞에서 강화로 출발하기전 회원들의 모습 뒤로 보이는 1970년 도원극장 / 1970
by 차철수
응암1동 신축 동사무소 준공 / 1975
응암1동 신축 동사무소 준공 / 1975
진관동사무소 개청식 / 1973.07.02
은평출장소 대조동 청사 준공식 / 1975
녹번동 서부소방서 개소식 / 1975
녹번동 서부소방서 개소식 / 1975
최초의 주택조합단지 기자촌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은 은평의 보물을 꼽으라면 기자촌 옛터일 것이다.
언론계 종사자들도 당시 주택난에 시달려야 했고, 이에 전국언론사의 기자들을 회원으로 하는 한국기자협회(1964년 창립)는 무주택 기자들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고자 기자들이 모여서 함께 부지를 마련하고 집을 짓는 주택사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주택조합을 결성하면서 기자촌이 태동했다. 공기 좋고 쾌적한 주택단지가 될 것이며 수려한 북한산이 감싸안고 있는 명당 중 명당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지금의 은평뉴타운 뒷부분인 기자촌 부지가 낙점되었다.
1969년 3월 24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 산64-1 국유지 144,214 ㎡를 67,200,000원에 불하받아 첫 삽을 뜨게 되었다. 일시불로 20%를 할인받아 3.3 ㎡당 1,540원이었으니 당시 인근 농지가 3.3 ㎡당 3,000원임을 감안하면 악산을 깎은 택지의 가격으로는 상당한 고가였다. 1968년 12월 20일 352명이 주택사업을 확정하고 12월 26일 한국기자협회주택조합 창립총회를 마침으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주택조합, ‘한국 기자촌주택조합’이 탄생한 것이다. 이어서 1969년 3월 29일, 기공식을 하고 사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1969년 11월 13일 동화통신의 이선명 기자의 첫 입주를 시작으로 기자촌 1차분 주택이 완공되어 본격적인 입주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1972년 8월 1일 기자촌 일대가 그린벨트 지역으로 선포되어 재테크면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지역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일대가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서울시민이 되었다. 이것이 서울의 마지막 확장이었는데,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마지막 편입지역의 주민이었다. ‘무주택 현직 언론인’이 기자촌의 유일한 입주자격이었다. 1971년 4월 19일 잔무를 완전히 정리하고 기자촌주택조합은 기자촌 건설사업 종료를 선언했다.
한국기자협회택지조성기공식 / 1969.03.29
by 오전식
한국기자협회택지조성기공식 / 1969.03.29
by 오전식
2015년 진관동 은평뉴타운에 '기자촌 옛터'라는 표지돌이 크게 세워졌다. 그 뒷면에 최초의 입주자인 기자협회주택조합 조합원 이름을 새겨 세운 표지돌은 기자촌의 역사 뿐 아니라 우리나라 주택조합의 효시를 전함과 동시에 한국 언론인의 중요 명부 중 하나라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언론사의 기자와 논객들이 고르게 들어간 명단이다 보니 훗날 한국 언론계의 지도급 인사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정계(政界)·관계(官界)의 요직에 발탁된 인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터전임을 설명하는 셈이다. '기자촌 옛터'라는 기념비문은 기자촌 건설 초창기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1차로 입주하여 은평뉴타운 편입으로 철거될 때까지 줄곧 기자촌을 지키고 살아온 일경 한영탁 (당시 조선일보 기자) 선생이 짓고 은평에서 오래 살고 있는 문단의 원로 이근배 (예술원 회원) 시조시인이 글씨를 썼다.
「수도물도 잘 나오지 않아 공동수도에서 받아써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서울시의 식수차가 물을 날라다 주어 갈증을 겨우 면하게 해주었다. 물장수의 신세도 졌다. 빨랫감을 모아서 이고 지고 진관사 계곡이나 삼천리골로 찾아가서 흐르는 맑은 물에 빨아 이고 돌아오곤 했다. 대학시절 딸기 먹으러 놀러오던 곳에 빨랫감을 이고 가면서 만감이 교차했지만 곧 좋아질 동네라는 희망으로 가슴이 뛰기도 했다.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젊은 부부들은 북한산 숲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며 온 세상이 자기들 것인 양 흐뭇하고 행복한 마을이었다. 자동차 왕래가 거의 없는 마을은 아이들의 천국이자 놀이터였기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울 수 있었다.
규모는 당시 국민주택 규모인 59.5㎡형으로 정하고 주택은행의 표준설계도 중 3가지 형태의 설계도를 확정하고 선택하도록 하였다. 슬라브형 지붕 1가지, 기와지붕형 2가지, 모두 3가지 설계였다. 그리고 상가 주택도 선택 범위에 넣었다. 기와지붕 중 하나는 'ㄱ'자 설계였고, 하나는 직사각형인 구조였는데 그 설계만 주방 옆에 식당 공간이 있는 설계였다. 그 설계만 완전 입식 부엌인 셈이었다. 두 가지 설계는 입식 부엌이긴 하지만 조리 공간만 있어 밥상을 차려 들고 나와야 하는 옛날 집 스타일이었다.
지금은 그 장면이 눈앞에 잘 그려지지 않을 정도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그 설계의 장점인 안방을 비롯한 방들의 면적이 넓다는 것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 슬라브형은 옥상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여름에 더울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기피하는 이도 있었다.」 - 오경자 진관동 -
기자촌 공사현장
by 오전식
한국기자협회 기자촌운영회
by 오전식
언론인과 문인, 그리고 지사들
기자촌의 언론인들은 동료의식을 기반으로 1970년대의 언론탄압에 저항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기자촌에 불이 꺼지는 날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대의 식이 존재했다. 기자촌과 그 주변에는 언론인 뿐 아니라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김광주-김훈 부자, 송건호, 백기완, 신달자, 최인훈, 이호철, 서기원, 박범신 등이 그들이었다. 지금도 은평구에 살고 있는 백기완은 최근 아시아 전역에 퍼진 명곡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사했다. 이런 인물들의 활동이 최근 국립한국문학관 은평 유치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국문학 속의 은평전 / 2016.04.19
이호철 작가와 함께 하는 토크 콘서트 / 2016.03.23
정지용 초당터 표지판 제막식 / 2016.04.26
김훈 작가와 함께 하는 토크 콘서트 / 2016.05.07
대표적인 분단문학가로 꼽히는 이호철 작가는 1960년대부터 불광동에 거주하며 집필활동을 했는데, 원산 출신으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경험을 살려 200편이 넘는 대부분의 작품을 분단 문제에 바쳤다. 궁극적으로는 전쟁의 '상처'를 넘어 '화해'를 이야기하는 작품들이다. 은평구는 독바위역 부근 도로를 이호철로라고 이름 지었고, 2017년부터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는데, 2019년에는 이 상의 시상식을 시작으로 통일로 문학페스티벌이 열린다. 또한 분단문학의 걸작 '광장'으로 유명한 최인훈 작가도 은평구에 오래 거주하였다. 이런 은평의 문단 분위기는 '은평구가 북한산 서북쪽 끄트머리에 자리해 휴전선도 가깝고 판문점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니, 남북통일, 다시 말해서 북한 문제 등에 대해서도 어떤 새로운 방법을 우리 문학인들이 한번 모색해보면 어떻겠는가'라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결국 6월 민주항쟁 다음 해인 1988년 11월, 은평구에 사는 문인들이 모여 '은평클럽'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은평구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문인들이 뜻있는 일을 해볼 길은 없을까 하는 취지로 시작해 한 달에 한 번 모임이 이루어졌다. 1918년생 박연희 선생을 첫 좌장으로 모시고 창립된 이후 1997년에는 은평문인협회로 변신하여 현재 100여명이 한국 현대문학의 큰 줄기인 은평문학의 전통을 이으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갈현동, 대조동, 불광동, 녹번동 일대 / 1971
by 차철수
중앙의 큰 건물 도원극장 (현 은평구청 및 은평문화예술회관) / 1971
by 차철수
은평의 문인들 중 많은 이들은 암울한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시대적 소명을 피하지 않았다. 제1세대 인권변호사이자 국민의 정부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은 법조인이 자 유머집과 수필집을 여러 권 내고 출판사를 열기도 한 문인이기도 했다. 한 변호사는 인생의 대부분을 은평에서 보냈다. 민주언론운동의 대표자인 송건호도 옥천에서 상경 한 후 역촌동에서 오래 살면서 대부분의 책을 은평에서 써냈으며 역촌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혹독한 5공 시절 동안 거시기산악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울분을 삭히며 지냈다. 북한산을 자주 다녔기에 불광동 주변에서 자주 모였고, 이호철 작가와 최근 은평에 자리잡은 한국고전번역원의 초대원장인 박석무도 그 모임의 일원이었다.
엄혹한 군부독재 시절, 은평은 재능과 뜻이 있었지만 옳은 일을 하다가 고통을 당한 이들의 울분을 감싸 안고 새로운 기운을 북돋아 주는 어머니 같은 역할을 맡았던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진관동 청사, 2018.08 개관
by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번역원 신청사 기공식 / 2016.11.09
한국고전번역원 신청사 기공식 / 2016.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