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의 유래와 역사
은평 땅은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에 속했고, 삼국시대 초중기에는 백제에 속했지만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568년(혹은 569년),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우면서부터였다. 신라는 은평 일대를 새로운 땅이라 하여 '신주'라고 불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산주'로 부르다가, 757년 경덕왕 7년에 '한주'로 고쳤다.
그리고 서울 지방에는 '한양군'을 설치했는데 서울의 옛 이름인 '한양'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원효대사가 삼각산을 등에 진 땅에 삼천사를 창건하여 은평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불교가 자리잡았다. 고려시대에는 '한양군'을 '양주'라 고치고, 1087년 문종 21년에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서경'(평양)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후 1308년 충렬왕 34년에 '한양부'로 개칭하였다.
삼천사와 인접한 진관사는 고려시대에 개창하였다. 당시 이름은 신혈사로 진관(津寬) 스님이 혼자 수도하는 작은 절이었는데, 이 스님이 이곳에서 고려의 실권자였던 천추태후로부터 훗날 고려 최고의 명군이 될 현종에 오르는 대량원군을 살려냈다. 이후 현종은 신혈사 터에 큰절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하였다. 그 뒤 진관사는 임금을 살린 은혜로운 장소로서 여러 왕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삼각산 적멸보궁 삼천사 / 1996
by 삼천사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보물 제657호) / 1995
by 삼천사
진관사 황성기독교청년회 하령회 / 1910
by 진관사
1394년 조선 태조 3년에 한양으로 도읍을 천도하면서 '한성부'로 이름을 바꿨으며, 서울 지역은 5부 52방으로 개편했는데, 지금의 구(區)에 해당하는 5부(동, 서, 남, 북, 중) 중 은평 지역은 북부의 산하 반송방 밖에 있던 연은면에 속해 있었다. 당시 한양 주변은 조선판 그린벨트제도라고 할 사산금표제를 실시하여 개간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진관동 백화사 입구에 서있는 경천군 이해령 사패지 송금비가 지금도 남아있어 그 때를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은평 지역의 인구는 사찰 주변의 사하촌과 의주로 부근을 제외하면 아주 적었다.
하지만 당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국으로 가는 길이자 두번째로 큰 도시 평양으로 가는 제1로, 즉 의주로가 은평 지역을 통과했다. 이 길은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간선도로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북경과 한양을 오가는 사신들을 위한 영은문과 모화관, 홍제원, 연서역 같은 중요한 시설이 들어섰다. 현 불광역에는 작은 고개가 있었는데 이곳을 경계로 북으로는 의주까지, 남으로는 부산까지가 똑같이 1,000리가 된다 하여 일명 양천리(兩千里)고개라고 하였다. 최근 표지석을 세워 이를 기리고 있다.
연신내 역을 넘어가는 고개를 지금도 '박석고개'라고 하는데, 사신 행렬이 길을 잘 지나가라고 박석을 깔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파발마가 지나갔기에 과거 은평에는 구파발동이 있었으며, 말이 은평구의 상징 캐릭터가 되었고, 1996년부터 파발제가 열렸다. 또한 209미터 높이의 봉산에는 봉화대가 있어 무악재 봉수대에 긴급한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박석고개 서낭당이 사신서낭당이라 고 중국에서 사신이 오게 되면 구파 발에서 말을 재우고 편자를 갈아 신 기고 목욕을 시키고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그 전에 박석고개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사신서낭당에서 저기 임금이 있는 경복궁을 박석고개 를 거쳐서 들어가는데 그 서낭당이 파발제와 연관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 걸 내가 구청하고 이야기를 해서 보 존시켜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그 소방서 옆에 있는 것을 보존하게 된 거지요. 지금은 내 친구 누이동생이 나이 70이 넘었는데 그 사람이 그걸 지키고 있어요.
이 마을 전체가 산신제를 음력 10월1일에 지내요. 저기 메디 텍고등학교 뒤에 산 속에서 지내요. 산신제는 이 진관동 주민 들이 편안하고 질병 없이 잘 지내게 해달라고 삼각산을 향해 서 제를 올리는 거에요. 옛날 방식대로, 몇 백 년 된 놋그릇도 내가 다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거기다 놓고 주관했지요. 축문 도 이 동네에서 만들어 놓은 게 있는데 그것도 내가 다 보존 해서 산신제와 파발제도 지냈어요. 」
- 김주환 진관동 -
세종대왕 재위시절, 진관사는 집현전 학자들의 사가 독서당 역할을 하면서 한글창제의 숨은 무대가 되기도 했으며, 세종의 여섯째 아들 화의군 이영의 묘역이 인근에 자리잡았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이 인근에서 벌어졌을 때, 불광동의 여장부(여성 의병장) 밥할머니는 인근 마을의 부녀자들을 이끌고 산성으로 들어가 치마 위에 덮치마를 만들어 두르고 주변의 돌들을 치마폭에 담아 날라 행주치마의 설화를 낳았다. 병자호란 때에는 청군의 침입로였으며, 그 사이에 벌어진 인조반정의 중요한 현장이 되기도 했다.
1457년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의 무덤이 들어서면서 동구릉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왕실묘역인 서오릉이 행정구역상으로는 고양시이긴 하지만 은평구 바로 옆에 조성되었다. 현대에 와서 서오릉은 은평구 초등학생과 중 · 고등학생들의 단골 소풍 장소가 되었고, 수많은 은평 주민들의 추억이 깃든 공간이자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은평구에서 제가 위로받는 장소는 서오릉이에요. 은평구 사람들은 어렸을 때 다 서오릉으로 소풍을 가요. 저는 12년 내내 갔어요. 지금은 집 가까운 데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이 들죠. 새벽 5시 40분에 서오릉에 가면 어르신들 30~40명이 모여 계셔요. 」 - 김영미 응암동 -
「서오릉에는 5기의 왕릉이 있잖아요. 그 능마다 사연이 있죠. 서오릉에 가서 역사공부를 많이 했어요. 태정태세문단세 그 왕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그런 게 다 쓰여있잖아요. 그래서 여기는 역사교육에 정말 좋은 데예요. 」 - 서성희 응암동 -
「은평 지역은 소풍을 서오릉 아니면 진관사로 갔었습니다. 어릴 적 서오릉 구르기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 - 서애란 대조동 -
서오릉 : 고갯길을 넘어가는 학생들 / 1961.06
by 삼천사
서오릉 : 불광초등학교 소풍 / 1967
by 권혜숙
서오릉 가는 길 : 궁말앞 길 (현 갈현동 152번 종점 구산 네거리 주위) / 1961.06
by 차철수
세조는 이듬해에 절을 지어 맏아들의 넋을 위로해주라고 명했다. 왕명을 받들어 1년 만에 완공해 1459년 절을 창건하니, 이를 정인사(正因寺)라 했는데 훗날 수국사(守國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증산동에는 세종 시기에 나주 나씨가 정착하여 현재 28대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1960년대 중반까지도 100여 가구가 살며 증산동 인구의 95%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10여 가구에 불과하다. 조선왕실의 크고 작은 살림을 담당했던 궁녀와 내시, 그리고 역관들의 무덤도 은평 일대에 즐비했었고, 특히 조선 제일의 역관 가문인 우봉 김씨의 집안 묘지인 이말산도 진관사 부근에 있으며, 역관 가문인 인동 장씨 출신 장희빈도 불광동에서 태어났다. 은평뉴타운 공사 당시 이 무덤들이 많이 발굴되어 재조명을 받았다.
금불초가 만개한 수국사 황금법당 풍경 / 2019.06
by 수국사
증산동 205-8 초가집 안마당 우물 / 1970
by 나창균
증산동 205-8 초가집 사랑채 / 1970
by 나창균
17세기 후반 이래 흉년이 계속되고 농촌사회가 붕괴되면서 전국의 유민들이 한양으로 몰려들었는데, 이런 현상은 19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서슬퍼런 사산금표제도 약화되어, 유민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대부분 한양 인근에 정착하면서 자연히 은평 일대를 포함한 한양 서쪽의 인구도 늘어났다. 그리하여 1727년(영조 3년), 백련산의 능선까지였던 종래의 성저십리 경계가 주민들의 요청으로 모래내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을 정식으로 한성부가 관할하기 위해 1788년(정조 12년)에 연희방, 연은방, 상평방을 설치했다. 은평구 지역은 연은방, 상평방 지역에 해당되었으며 ‘은평’이라는 고유명사는 이 연은방과 상평방에서 한 글자씩 따라 명명된 것이다. 19세기 후반에는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이자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상을 떠난 금성대군을 모시는 금성당이 세워졌다.
「이말산이 조선왕실에서 평생 봉직하다가 돌아가신 궁인들이 묻혀있는 곳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금성당은 거기 와도 관련되어 있고, 진관사와도 연관이 있어요. 이 분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려면 진혼제를 해야 되잖아요. 그런 역할을 했던 곳이에요. 그래서 조선왕실에서 후원을 하고 동시에 나라와 지역민들의 태평을 기원했던 곳이죠. 다른 곳은 없어지고 여기만 유일하게 남았어요. 」 - 양종승 은평구 샤머니즘박물관장 -
오백 년이 넘도록 마르지 않은 우물터와 신제단이 있는 증산동 반홍산. 그곳에선 수백 년 전부터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반홍산 산신제’가 열린다.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반홍산 정상아래 반홍산신제단에서 행해지는 산신제는 그 주신이 반홍산신으로, ‘부정(不淨)이 없는 사람’을 제관으로 정하고, 의례는 유교 예식에 따라 경건히 진행된다. 증산동 주민들은 수백 년간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계승하고자 매년 정성스레 제를 준비하고 모시며, 동네의 액운이 소멸되길 기원하고 있다.
은평 지역은 늘어나는 성 안팎의 인구가 소비하는 채소와 화초를 공급하기 위해 상업작물 재배지역으로 바뀌어갔다. 은평 토박이 어르신들은 20세기 중반까지도 다양한 채소와 과일, 화초를 인접한 영천시장이나 옥인, 금천, 남대문시장에 공급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녹번 고개는 지금도 산골고개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는데, 산골이라는 빤짝거리는 광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광물은 접골용 약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전주이씨 환갑기념촬영 (나창균 생가 앞마당)
by 나창균
중종 숙의 나씨묘를 증산동에서 경기도 이천으로
이장하기 전 제사 지내는 모습 / 1969
by 나창균
추석명절 나창균씨댁 제사 (단체로 절하는 모습)
by 나창균
19세기 말,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변신하면서 나름대로의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외세의 침입과 내부 갈등으로 크게 흔들렸다. 파발이나 중국으로 가는 사신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으며, 기존의 제도와 관습은 급격하게 힘을 잃어갔다. 개신교가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고, 수많은 서구 문물이 밀려들었다. 서대문과 마포 일대에 교회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은평에는 응암교회가 1931년에야 처음으로 들어섰다.
「당시 응암교회는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응암리 181번지에 있었는데, 현재 영락중학교 근처 아래쪽 에 있었어요. 은평면에 응암교회 하나밖에 없을 때 였어요. 」 - 차철수 대조동 -
응암교회 돌예배당 신축공사 / 1961.10.24
by 차철수
응암교회 / 신축광경 / 1956.05.01
by 차철수
응암교회 /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응암리 181번지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응암교회의 모습 / 1934.05
by 차철수
응암교회 / 응암동 6-1 건축하는 모습 / 1958
by 차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