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Storytelling
개청 40주년 은평구 스토리텔링 사진집
은평, 그곳에 살다
Eunpyeong, live there.
01
서울시 이전의 은평
서울시 이전의 은평을 소개 합니다.
02
은평의 서울시대
광복 이후 은평의 서울시대 시작.
03
은평구의 탈바꿈
함께 살아가는 은평, 은평구의 탈바꿈
04
비상하는 은평의 21세기
시대 정신을 잘 알고 실천하는 시민
은평의 유래와 역사
은평 땅은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에 속했고, 삼국시대 초중기에는 백제에 속했지만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568년(혹은 569년),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우면서부터였다. 신라는 은평 일대를 새로운 땅이라 하여 '신주'라고 불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산주'로 부르다가, 757년 경덕왕 7년에 '한주'로 고쳤다.
그리고 서울 지방에는 '한양군'을 설치했는데 서울의 옛 이름인 '한양'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원효대사가 삼각산을 등에 진 땅에 삼천사를 창건하여 은평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불교가 자리잡았다. 고려시대에는 '한양군'을 '양주'라 고치고, 1087년 문종 21년에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서경'(평양)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후 1308년 충렬왕 34년에 '한양부'로 개칭하였다.
삼천사와 인접한 진관사는 고려시대에 개창하였다. 당시 이름은 신혈사로 진관(津寬) 스님이 혼자 수도하는 작은 절이었는데, 이 스님이 이곳에서 고려의 실권자였던 천추태후로부터 훗날 고려 최고의 명군이 될 현종에 오르는 대량원군을 살려냈다. 이후 현종은 신혈사 터에 큰절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하였다. 그 뒤 진관사는 임금을 살린 은혜로운 장소로서 여러 왕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은평 전경 / 1968
by 차철수
삼각산 적멸보궁 삼천사 / 1996
by 삼천사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보물 제657호) / 1995
by 삼천사
진관사 황성기독교청년회 하령회 / 1910
by 진관사
진관사 / 1950 이전
by 진관사
진관사 / 2011
1394년 조선 태조 3년에 한양으로 도읍을 천도하면서 '한성부'로 이름을 바꿨으며, 서울 지역은 5부 52방으로 개편했는데, 지금의 구(區)에 해당하는 5부(동, 서, 남, 북, 중) 중 은평 지역은 북부의 산하 반송방 밖에 있던 연은면에 속해 있었다. 당시 한양 주변은 조선판 그린벨트제도라고 할 사산금표제를 실시하여 개간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진관동 백화사 입구에 서있는 경천군 이해령 사패지 송금비가 지금도 남아있어 그 때를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은평 지역의 인구는 사찰 주변의 사하촌과 의주로 부근을 제외하면 아주 적었다.
하지만 당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국으로 가는 길이자 두번째로 큰 도시 평양으로 가는 제1로, 즉 의주로가 은평 지역을 통과했다. 이 길은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간선도로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북경과 한양을 오가는 사신들을 위한 영은문과 모화관, 홍제원, 연서역 같은 중요한 시설이 들어섰다. 현 불광역에는 작은 고개가 있었는데 이곳을 경계로 북으로는 의주까지, 남으로는 부산까지가 똑같이 1,000리가 된다 하여 일명 양천리(兩千里)고개라고 하였다. 최근 표지석을 세워 이를 기리고 있다.
연신내 역을 넘어가는 고개를 지금도 '박석고개'라고 하는데, 사신 행렬이 길을 잘 지나가라고 박석을 깔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파발마가 지나갔기에 과거 은평에는 구파발동이 있었으며, 말이 은평구의 상징 캐릭터가 되었고, 1996년부터 파발제가 열렸다. 또한 209미터 높이의 봉산에는 봉화대가 있어 무악재 봉수대에 긴급한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박석고개 서낭당이 사신서낭당이라 고 중국에서 사신이 오게 되면 구파 발에서 말을 재우고 편자를 갈아 신 기고 목욕을 시키고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그 전에 박석고개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사신서낭당에서 저기 임금이 있는 경복궁을 박석고개 를 거쳐서 들어가는데 그 서낭당이 파발제와 연관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 걸 내가 구청하고 이야기를 해서 보 존시켜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그 소방서 옆에 있는 것을 보존하게 된 거지요. 지금은 내 친구 누이동생이 나이 70이 넘었는데 그 사람이 그걸 지키고 있어요.
이 마을 전체가 산신제를 음력 10월1일에 지내요. 저기 메디 텍고등학교 뒤에 산 속에서 지내요. 산신제는 이 진관동 주민 들이 편안하고 질병 없이 잘 지내게 해달라고 삼각산을 향해 서 제를 올리는 거에요. 옛날 방식대로, 몇 백 년 된 놋그릇도 내가 다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거기다 놓고 주관했지요. 축문 도 이 동네에서 만들어 놓은 게 있는데 그것도 내가 다 보존 해서 산신제와 파발제도 지냈어요. 」 - 김주환 진관동 -
경천군 이해령 사패지 송금비
by 은평문화원
양천리 유래비1
양천리 유래비2
세종대왕 재위시절, 진관사는 집현전 학자들의 사가 독서당 역할을 하면서 한글창제의 숨은 무대가 되기도 했으며, 세종의 여섯째 아들 화의군 이영의 묘역이 인근에 자리잡았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이 인근에서 벌어졌을 때, 불광동의 여장부(여성 의병장) 밥할머니는 인근 마을의 부녀자들을 이끌고 산성으로 들어가 치마 위에 덮치마를 만들어 두르고 주변의 돌들을 치마폭에 담아 날라 행주치마의 설화를 낳았다. 병자호란 때에는 청군의 침입로였으며, 그 사이에 벌어진 인조반정의 중요한 현장이 되기도 했다.
1457년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의 무덤이 들어서면서 동구릉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왕실묘역인 서오릉이 행정구역상으로는 고양시이긴 하지만 은평구 바로 옆에 조성되었다. 현대에 와서 서오릉은 은평구 초등학생과 중 · 고등학생들의 단골 소풍 장소가 되었고, 수많은 은평 주민들의 추억이 깃든 공간이자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은평구에서 제가 위로받는 장소는 서오릉이에요. 은평구 사람들은 어렸을 때 다 서오릉으로 소풍을 가요. 저는 12년 내내 갔어요. 지금은 집 가까운 데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이 들죠. 새벽 5시 40분에 서오릉에 가면 어르신들 30~40명이 모여 계셔요. 」 - 김영미 응암동 -
「서오릉에는 5기의 왕릉이 있잖아요. 그 능마다 사연이 있죠. 서오릉에 가서 역사공부를 많이 했어요. 태정태세문단세 그 왕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그런 게 다 쓰여있잖아요. 그래서 여기는 역사교육에 정말 좋은 데예요. 」 - 서성희 응암동 -
「은평 지역은 소풍을 서오릉 아니면 진관사로 갔었습니다. 어릴 적 서오릉 구르기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 - 서애란 대조동 -
서오릉 : 고갯길을 넘어가는 학생들 / 1961.06
by 삼천사
서오릉 / 1959
by 최준호
서오릉 : 불광초등학교 소풍 / 1967
by 권혜숙
서오릉 가는 길 : 궁말앞 길 (현 갈현동 152번 종점 구산 네거리 주위) / 1961.06
by 차철수
진관동 산신제
by 김주환
진관동 산신제
by 김주환
진관동 산신제
by 김주환
세조는 이듬해에 절을 지어 맏아들의 넋을 위로해주라고 명했다. 왕명을 받들어 1년 만에 완공해 1459년 절을 창건하니, 이를 정인사(正因寺)라 했는데 훗날 수국사(守國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증산동에는 세종 시기에 나주 나씨가 정착하여 현재 28대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1960년대 중반까지도 100여 가구가 살며 증산동 인구의 95%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10여 가구에 불과하다. 조선왕실의 크고 작은 살림을 담당했던 궁녀와 내시, 그리고 역관들의 무덤도 은평 일대에 즐비했었고, 특히 조선 제일의 역관 가문인 우봉 김씨의 집안 묘지인 이말산도 진관사 부근에 있으며, 역관 가문인 인동 장씨 출신 장희빈도 불광동에서 태어났다. 은평뉴타운 공사 당시 이 무덤들이 많이 발굴되어 재조명을 받았다.
금불초가 만개한 수국사 황금법당 풍경 / 2019.06
by 수국사
증산동 205-8 초가집 안마당 우물 / 1970
by 나창균
증산동 205-8 초가집 사랑채 / 1970
by 나창균
17세기 후반 이래 흉년이 계속되고 농촌사회가 붕괴되면서 전국의 유민들이 한양으로 몰려들었는데, 이런 현상은 19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서슬퍼런 사산금표제도 약화되어, 유민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대부분 한양 인근에 정착하면서 자연히 은평 일대를 포함한 한양 서쪽의 인구도 늘어났다. 그리하여 1727년(영조 3년), 백련산의 능선까지였던 종래의 성저십리 경계가 주민들의 요청으로 모래내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을 정식으로 한성부가 관할하기 위해 1788년(정조 12년)에 연희방, 연은방, 상평방을 설치했다. 은평구 지역은 연은방, 상평방 지역에 해당되었으며 ‘은평’이라는 고유명사는 이 연은방과 상평방에서 한 글자씩 따라 명명된 것이다. 19세기 후반에는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이자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상을 떠난 금성대군을 모시는 금성당이 세워졌다.
「이말산이 조선왕실에서 평생 봉직하다가 돌아가신 궁인들이 묻혀있는 곳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금성당은 거기 와도 관련되어 있고, 진관사와도 연관이 있어요. 이 분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려면 진혼제를 해야 되잖아요. 그런 역할을 했던 곳이에요. 그래서 조선왕실에서 후원을 하고 동시에 나라와 지역민들의 태평을 기원했던 곳이죠. 다른 곳은 없어지고 여기만 유일하게 남았어요. 」 - 양종승 은평구 샤머니즘박물관장 -
금성당 / 2015
by 양종승
금성당 / 2015
by 양종승
금성당 / 2006
by 양종승
금성당 사랑채 / 2015.01
by 양종승
금성당 내부 / 2004
by 양종승
오백 년이 넘도록 마르지 않은 우물터와 신제단이 있는 증산동 반홍산. 그곳에선 수백 년 전부터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반홍산 산신제’가 열린다.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반홍산 정상아래 반홍산신제단에서 행해지는 산신제는 그 주신이 반홍산신으로, ‘부정(不淨)이 없는 사람’을 제관으로 정하고, 의례는 유교 예식에 따라 경건히 진행된다. 증산동 주민들은 수백 년간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계승하고자 매년 정성스레 제를 준비하고 모시며, 동네의 액운이 소멸되길 기원하고 있다.
은평 지역은 늘어나는 성 안팎의 인구가 소비하는 채소와 화초를 공급하기 위해 상업작물 재배지역으로 바뀌어갔다. 은평 토박이 어르신들은 20세기 중반까지도 다양한 채소와 과일, 화초를 인접한 영천시장이나 옥인, 금천, 남대문시장에 공급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녹번 고개는 지금도 산골고개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는데, 산골이라는 빤짝거리는 광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광물은 접골용 약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나창균씨 조부모님
by 나창균
나창균씨 조모님 회갑연
by 나창균
전주이씨 환갑기념촬영 (나창균 생가 앞마당)
by 나창균
중종 숙의 나씨묘를 증산동에서 경기도 이천으로
이장하기 전 제사 지내는 모습 / 1969
by 나창균
추석명절 나창균씨댁 제사 (단체로 절하는 모습)
by 나창균
증산동 반홍산 산신제 / 2017.11.18
증산동 반홍산 산신제 옛모습
반홍산 우물에 대해 설명하는 나창균씨
산골고개 산골 광산 안내판
19세기 말,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변신하면서 나름대로의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외세의 침입과 내부 갈등으로 크게 흔들렸다. 파발이나 중국으로 가는 사신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으며, 기존의 제도와 관습은 급격하게 힘을 잃어갔다. 개신교가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고, 수많은 서구 문물이 밀려들었다. 서대문과 마포 일대에 교회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은평에는 응암교회가 1931년에야 처음으로 들어섰다.
「당시 응암교회는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응암리 181번지에 있었는데, 현재 영락중학교 근처 아래쪽 에 있었어요. 은평면에 응암교회 하나밖에 없을 때 였어요. 」 - 차철수 대조동 -
응암교회 돌예배당 신축공사 / 1961.10.24
by 차철수
응암교회 / 신축광경 / 1956.05.01
by 차철수
응암교회 /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응암리 181번지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응암교회의 모습 / 1934.05
by 차철수
응암교회 / 응암동 6-1 건축하는 모습 / 1958
by 차철수
응암교회 전경 / 2012
by 차철수
서울의 서쪽 관문 수색역과 신작로
밀려든 신문물 중 가장 충격적인 존재는 ‘철도’였다. 교통수단이라고는 두 발, 잘해야 말과 나룻배가 전부였던 시절에 거대한 쇳덩어리가 말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는 것은 시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엄청난 충격이었다. 1904년 2월,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경의선 철도 건설에 나섰고, 우리나라의 토지와 노동력, 물자를 무자비하게 수탈하여 1905년 11월에 경의선 철도를 개통하였다.
파발마와 사신일행이 지나가지 않게 된 은평 땅에는 대신 수색역이 들어섰다. 수색역은 경의선 철도 첫 건설 당시부터 개설되었는데, 부지 면적은 약 24만㎡에 달했다. 당시의 경의선은 임시 군용철도나 마찬가지였기에, 역사도 군대막사와 다를 바 없는 단층 목조 가건물이었다. 1908년 정식 영업을 시작한 수색역은 당시 경성의 서쪽 관문으로 인식 되었다
수색역 공사
by 역장님
수색역 / 1979 이전
수색역 / 1980 이후
by 역장님
서울지구 철도시설확장 수색차량기지신설기공식 / 1968.08.07
수색역 공사
수색역이 확연하게 변모하게 된 계기는 조차장 건설 때부터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경성, 평양, 대구, 부산 등에 조차장을 신설하기로 했는데, 가장 중요한 경성지역을 맡을 조차장으로 수색역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착공 당시 수색역 조차장은 조선에서 제일 큰 정거장으로 한 번에 약 2,000량의 여객차와 화차를 수용, 정리할 수 있는 최신 시설로 계획되었다. 조차장 건설 이후 수색역은 단순한 정거장의 기능보다는 전국 각지로 떠나는 열차를 정비하고 발차 준비를 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이후 조성된 철도 종사자들이 거주하는 관사촌은 지금의 수색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수색로 304_1번지 / 2010
출처 :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수색역 플랫폼
by 역장님
수색로 22가길 4번지마당 / 2010
출처 :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수색로 320-1번지 / 2010
출처 :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느티나무길 10번지 / 2010
출처 :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수색로 22길 2-12번지 / 2010
출처 :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수색로 320-14번지 / 2010
출처 :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1937년은 중일전쟁이 시작되는 해였고, 수색변전소가 가동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이후 수색역은 일본군의 보급기지가 되었는데, 그 증거 중 하나가 최근 복원된 수색역 인근인 마포구 상암동의 일본군 장교관사이다. 그러나 수색역은 일제의 침략기지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대륙으로 떠나는 독립투사들도 수색역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망명 시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 1919년 11월 11일, 의친왕은 수색역에서 중국행 열차에 탑승하여 상해임시정부 행을 시도하였으나 중국 안동(현재의 단동)에서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알려진 부민관 폭탄 의거에서 사용된 시한폭탄은 수색변전소에서 빼돌린 자재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21세기 들어 시작된 상암동 개발과 경의선 전철화로 인해 옛 벽돌 역사가 사라져 많은 주민들은 지금도 이를 아쉬워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10월부터 서울 도로의 보수와 신설에 착수했다. 이 도로는 보통 '신작로(新作路)'라고 불렸다. 하지만 당시 총독부의 재정은 넉넉하지 않았고, 이미 구한말 경부선과 경의선 건설 당시부터 조선인의 재산과 노동력을 마음대로 쓴바 있어서 총독부는 헌병의 총칼로 인력을 거의 무상 동원했다. 이런 조선 민중의 피눈물을 먹고 의주로가 신작로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1914년 7~9월의 기록을 보면, 거의 1만 명의 주민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고 그 중 은평면 출신이 약 20%를 차지했다. 지금의 통일로인 경의로가 1등 도로라지만 폭은 7미터 정도에 불과했고 일부만 포장되었을 뿐 대부분은 자갈길이었다.
수색변전소 : 수색변전소 근무한 지병호님 / 1960 초
출처 :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수색변전소 : 나원습씨 집 뒷편으로 보이는 수색변전소 / 1960년대
출처 :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수색변전소 : 수색변전소 직원숙소 (옛 관사) / 2010
출처 :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수색변전소 : 수색변전소 입구 / 2010
출처 :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수색변전소 : 메디컬 빌딩에서 수색변전소 / 2010
출처 : 물빛 고운 동네 수색, 증산
일제 강점기의 은평
1910년 8월 29일, 완전병합에 성공한 일제는 한성부를 폐지하고 경성부를 두었는데, 같은 부이지만 수도의 지위에서 격하시켜 경기도 산하에 두었다. 조선시절의 '방'은 면으로 바뀌어 은평면이 되었는데, 당시 면사무소는 녹번 삼거리에 있었다. 1914년 4월, 은평면은 경성부에서 벗어나 고양군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는데, 은평면도 예외가 아니었다. 은평 주민들은 10일에는 수색에서 만세시위를, 22일에는 역촌리에서 횃불시위를, 22, 23일에는 신사리와 녹번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해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 하지만 은평의 독립운동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2009년 5월 칠성각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와 신문들이다. 진관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투사 백초월 스님과 관련이 있는 이 태극기는 3·1운동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 현장에서 발간된 상해판 독립신문 <조선독립신문 >등 6종 16점의 문서와 함께 발견되어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태극기 / 진관사 문화재 설명회 / 2009
태극기 / 진관사 문화재 설명회 / 2009
특별기획전 3.1혁명과 백초월 개막식 / 2019.02.26
특별기획전 3.1혁명과 백초월 개막식 / 2019.02.26
특별기획전 3.1혁명과 백초월 개막식 / 2019.02.26
은평 지역 대부분은 농지였고, 주민들은 농민, 지주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1931년의 자료에 의하면 은평면은 농업 종사자가 전체 인구의 63.9%인 4,095명에 달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 대자본의 조선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교통이 편리한 영등포 일대에는 제조업이 급속하게 육성되었고, 은평은 풍치지구와 농업지대로 조성되어 1914년 일본 농업경영회사가 자본금 100만원의 거금을 투입, 불이흥업이라는 기업형 농장을 설립하였다. 불이흥업은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힘입어서 최대 규모의 농장회사로 성장했다. 일제의 대륙 침략 전쟁으로 군납이 활성화 되었고, 불이농장 안에서는 돼지 수천 마리, 닭 수만 마리를 키우기도 했다. 옛 국립보건원 앞 사거리 건너편에는 큰 마구간이 있어 그쪽에서는 군마를 많이 키웠다.
불이농장 전경 / 1940
by 차철수
불이농장 : 여름 불이농장에서 밭 매는 모습 (현 불광1동 현대APT 일대) / 1943
by 차철수
1938년에는 약 310만㎡에 달하는 은평면 이와무라농장에서 은평 농민들이 일본인 지주를 상대로 쟁의를 일으켜 은평의 독립운동 전통을 되살렸다.
「1938년 대구에 살다가 형님이 다니는 불이(不二) 흥업주식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가족이 올라와 불 이흥업주식회사 양계장에서 일하게 되었지요. 그 때 불이흥업주식회사는 고양군 은평면 녹번리와 불광동에 위치한 곳인데 지금으로는 혁신파크와 불광시장 일대니까 규모가 아주 컸어요. 아마 수백 만제곱미터는 되었을 거예요. 」 - 차철수 대조동 -
불이흥업주식회사 : 양계장과 양돈장에서 사용하는 차량 / 1943
by 차철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초 불광리 닭장뒷집 불이농장사택에서 차철수일가 / 1940
by 차철수
한편, 일제강점기에 문을 연 학교 중 주목할 만한 존재는 1928년 개교한 신도초등학교와 1931년 문을 연 은평초등학교, 1935년 개교한 수색초등학교다.
「신도초등학교를 1대 아버님은 1회에 졸업하시고, 2대 본인은 22회, 3대 아 들은 46회로 3대 모두가 신도초교를 나와 자랑스럽습니다.」 - 김주환 진관동 -
「우리 첫째 아이가 1977년 2월 진관동 에 있는 신도초등학교를 졸업하던 사 진이에요. 그때는 약 1만5천세대쯤 살아서 학생들도 많았지요. 아들 삼 형제 모두 이곳에서 자라고 생활했던 곳이지요. 뉴타운 개발하면서 신도초 등학교가 없어졌다가 주민들이 입주 하면서 재개교를 했지요. 」 - 엄태평 진관동 -
신도초등학교 교사전경 / 1973
by 신도초등학교
수색초등학교 교사전경 / 1983
by 수색초등학교
1936년 조선총독부는 경성에 인접한 지역 일부를 경성부로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은평면에서 경성부로 편입된 지역은 창의문 밖 부암동과 홍제리 일대로 현재 은평구 지역은 그대로 고양군 산하로 남았다. 1943년에는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서대문구와 마포구가 탄생했다. 2년 후 은평 땅도 감격적인 해방을 맞았다.
은평초등학교 조회 전경 / 1945
by 차철수
은평초등학교 14회 6학년 여학생 일동 / 1945
by 차철수
은평초등학교 14회 6학년 남학생 일동 / 1945
by 차철수
은평초등학교 졸업식: 동생 졸업식에 형제들과 / 1967
by 김동환
은평초등학교 14회 졸업기념 개천절 봉축 학예회 / 1945
by 차철수
수색초등학교 전경 / 1970년대
by 수색초등학교
수색초등학교 11회 졸업식 / 1948
by 김인규
수색초등학교 운동회 / 1973
by 수색초등학교
수색초등학교 교사전경 / 1930~1940년대
by 수색초등학교
신도초등학교 큰아들 졸업식 / 1977
by 엄태평
신도초등학교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교실풍경 / 1973
by 신도초등학교
신도초등학교 음악수업 / 1982
by 신도초등학교
신도초등학교 근처풍경 / 1997
by 신도초등학교
신도초등학교 입학식 / 1982
by 신도초등학교
신도초등학교 청소모습 / 1982
by 신도초등학교